
영화 「중경삼림」은 1990년대 홍콩이라는 도시 공간을 배경으로, 스쳐 지나가는 인연과 정착하지 못하는 마음을 몽환적인 리듬과 색채 속에 담아낸 로맨틱 멜랑콜리다. 범죄·로맨스·코미디 요소가 뒤섞여 있지만, 핵심에는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갈 힘을 찾는가’라는 조용한 질문이 놓여 있다.
스쳐 지나간 두 번의 사랑, 서로 닿지 않는 이야기들
영화는 서로 느슨하게 연결된 두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223호 형사는 애인 메이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뒤, 유통기한이 같은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으며 관계의 만료를 받아들이려 하고, 그 과정에서 금발 가발을 쓴 마약 밀매상 여인을 만나 짧지만 묘한 하룻밤의 동행을 경험한다. 이어지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승무원 여자친구에게 이별 편지를 받은 663호 형사가 실연의 여파로 무기력해지고, 그가 자주 찾는 스낵바에서 일하는 페이가 그의 집 열쇠를 손에 쥔 뒤, 몰래 집을 드나들며 조금씩 그의 일상과 공간을 바꾸어 나간다.
흐릿한 네온과 불안한 카메라가 만든 ‘감정의 도시 풍경’
왕가위와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은 핸드헬드, 저프레임, 슬로 셔터, 네온과 그림자를 활용해, 홍콩의 밤거리를 속도와 고독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그려낸다. 이야기의 인과관계보다 인물들의 감정 상태를 우선시하는 편집과 내레이션, 반복되는 팝송과 라디오 같은 소품들은, 관객이 줄거리를 따라가기보다 ‘정서의 진동’을 체험하게 만든다. 범죄 스릴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체성·고립·욕망의 문제를 시각적 스타일과 일상의 사소한 습관들(파인애플 캔, 수족관, 인형, 음악)로 은유해, “스타일이 곧 내용”이라는 말을 체감하게 하는 영화다.
홍콩 뉴웨이브의 정점이자 세계 영화가 사랑한 도시 멜로드라마
「중경삼림」은 홍콩 반환을 앞둔 1990년대 초, 불안과 설렘이 공존하던 도시 정서를 한 편의 로맨스로 압축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개봉 당시에는 로컬 시장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지만, 이후 타란티노가 북미에 소개하며 세계적인 컬트 클래식이 되었고, 왕가위 스타일의 결정판으로 자리 잡았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도시, 어디에도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인물들은, 글로벌 도시의 고립감을 다룬 이후 영화들에 큰 영향을 주며, ‘도시 로맨스’라는 서브장르의 상징적 레퍼런스로 자주 언급된다.
영화과에서 스타일과 감정의 관계를 가르치는 대표 텍스트
이 영화가 영화과 수업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이유는, 서사 구조·촬영·편집·사운드가 ‘감정 표현’과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한 눈에 보여 주는 교본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에피소드 구조, 반복되는 모티프(숫자 223, 유통기한, 캘리포니아, 항공 승무원), 내레이션과 다이얼로그의 비대칭 등은, 비전통적인 플롯 설계와 인물 심리 묘사를 분석하기에 좋은 재료를 제공한다. 또한 저예산·소규모 제작 환경에서 어떻게 강렬한 시각적 스타일을 구축하고, 촬영 기법(모션 블러, 네온, 반사·굴절 샷)을 통해 ‘도시의 시간성’과 ‘감정의 흔들림’을 형상화하는지 배우는 데 최적의 사례로 활용된다.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마음에게 건네는 은근한 위로
「중경삼림」을 꼭 봐야 하는 이유는, 대단한 드라마틱 사건이 아니라 사소한 반복과 우연 속에서도 삶이 미세하게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무겁지 않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만은 않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실연의 상처, 타이밍이 어긋난 만남, 말로 설명되지 않는 끌림 같은 감정들을, 이 영화는 ‘정답’ 대신 여러 개의 가능성으로 남겨 두어, 관객이 자신의 경험을 투영할 여지를 넉넉하게 열어 둔다. 네온 불빛과 좁은 계단, 패스트푸드 가게의 형광등 아래서 나누는 대화들을 따라가다 보면, 불안정한 도시의 시간을 견디는 방법이 꼭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누군가의 작은 습관과 시선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위로를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