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지영 감독의 2026년 작품 「내 이름은」은 제주4·3사건 78주기를 맞아 개봉하는 첫 장편 상업영화로, ‘이름조차 지워진 사람들’의 기억을 오늘로 불러오는 현대사 드라마다. 렛츠필름·아우라픽처스 제작, CJ CGV·와이드릴리즈 배급으로 4월 15일 극장 개봉하며, 실화 기반 작품을 집요하게 만들어 온 정지영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다시 한 번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만난다.
작품 개요·출연진·줄거리
영화는 두 세대를 축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1998년 제주, 18살 영옥은 ‘촌스럽고 부담스러운’ 자기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하고, 엄마 정순은 봄만 되면 이유 없이 심한 불안과 공황 증상을 겪는다.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정순의 잃어버린 어린 시절 기억, 곧 1949년 제주4·3 당시 9살 소녀였던 ‘정순’의 비극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정순(현재): 염혜란 – 손자뻘 아들을 키우는 엄마로, 매년 4월만 되면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악몽에 시달린다.
*영옥: 신우빈 –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하는 18세 아들로, 학교 폭력과 집단 따돌림 속에서 ‘이름’과 정체성의 문제를 겪는다.
*어린 정순: 아역 배우가 맡아, 4·3의 한복판에서 친구 영옥과 뒤바뀐 이름 때문에 비극의 당사자가 되는 소녀를 연기한다.
*영옥(과거), 정순의 가족·마을 사람들: 4·3 당시 ‘폭도의 가족’으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서로를 숨기고 속이던 제주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구조 속에서, 영옥은 엄마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 그리고 제주4·3의 비극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아가며, 이름을 바꿔 지우고 싶었던 자신의 역사가 사실은 기억되고 불려야 할 것임을 깨닫게 된다.
제주4·3을 담아낸 방식과 영화 속 제주의 모습
「내 이름은」이 택한 방식은, 거대한 학살의 전말을 연대기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한 가족·두 세대의 서사에 4.3의 상처를 응축하는 것이다. 4.3은 영화 속에서 “이름을 말할 수 없게 만든 역사”로 그려진다. 가족이 희생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폭도의 가족’으로 낙인찍히고, 취업·결혼·일상 전체가 막혀 버리는 공포 때문에, 제주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사건을 입 밖에 꺼내지 못한다. 정순이 기억을 되찾을수록 드러나는 것은 자식·남편·친구의 연달은 죽음이며, 그 기억은 결코 추억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국가 폭력의 잔상이다.
제주의 풍경은 엽서 같은 관광지가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과 겹쳐 보이는 트라우마의 무대’로 비춰진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만 봐도 기절할 만큼 괴로워하는 정순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아름답다고 소비하는 제주의 자연 위에 얼마나 많은 비명이 켜켜이 쌓여 있는지를 상기시킨다. 평론가들은 “폭싹 속았수다에서 보여준 제주의 정서를 한층 더 깊게 파고들었다”는 평가와 함께, 풍경이 배경을 넘어서 기억과 죄책감의 레이어로 작동한다고 짚는다.
해외 영화제 출품 : 베를린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작
「내 이름은」은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공식 초청되며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베를린 상영 당시, 상영 후 기립 박수가 이어졌고, 관객들은 Q&A에서 “한국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이름 없는 희생자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정지영 감독은 인터뷰에서 “아직도 많은 국민이 제주4.3사건을 잘 모른다. 이 영화를 통해 궁금해하고, 스스로 찾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하며, 영화가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의 형식을 취했음에도 분명한 교육적·기억의 목적을 갖고 있음을 드러냈다. 국내 평론가 평점은 대체로 ‘6점대 중반’ 수준으로, 지나치게 무겁고 구조가 복잡해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주제 의식과 연기의 힘은 분명히 인정받는 분위기다.
우리가 꼭 봐야 하는 이유
「내 이름은」을 봐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몰랐던 사건을 알려주는 역사 영화’라서가 아니다. 이 작품은 1948년의 총성과 1998년 학교 교실의 폭력이 한 선 위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국가가 휘두른 폭력이 이름 하나를 빼앗고, 그 이름을 지우고 싶어 하는 후손에게까지 어떻게 스며드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4.3은 더 이상 ‘과거의 특별한 비극’이 아니라 지금도 반복되는 폭력의 구조로 다가온다.
또한 염혜란의 연기는 “제주4.3의 살풀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만큼, 잊힌 이름과 기억을 몸으로 끌어올리는 과정 그 자체처럼 느껴진다는 평을 받는다. 우리가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는, 제주4·3사건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한 채 사라진 이들의 이야기에 처음으로 귀 기울이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내 이름은」을 마주하는 일은, 결국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었냐”고 조용히 묻고, 그 이름을 기억 속에 새기는 행위이기도 하다.